빛의 그물로 짠 조각들

- 지선경이 그리는 조형미학의 그물코

 

김종길 | 미술평론가

 

#1. 주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에의 ‘깊은 눈’

그는 감각의 다섯 꾸러미(五蘊)에 충실한 예술가다. 불교에서 다섯 꾸러미를 빛(色)․받(受)·꿍(想)·가(行)·알(識)이라 한다.

빛은 몸을 드러낸다. 그래서 몸을 몬바탕(物質)의 상징으로 본다. 나머지 넷은 마음줏대(精神)의 상징이다. 몸의 그물코인 마음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 받은 느낌이 꿍꿍(想像)과 꿈꿍(夢想)으로 피어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앎(想), 하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챔(識)으로 이뤄진다.

그가 다섯 꾸러미에서 가장 재빠르게 느끼는 감각은 몸(色)인 듯하다.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며, 또 촉각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닿는 몸각(身覺)의 반응들은 아주 예민해서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언제나 돌이켜 살폈으리라. 그러니 작업의 시작은 몸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실마리가 아닐까. 그리고 그 실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바람의 이야기로, 곤충들의 이야기로, 달의 이야기로, 집집 우주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예컨대 그것은 낮게 흐르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잔물결일 수 있고, 스치듯 지나가는 어떤 장면들이 먼 기억으로 이어져서 일으키는 아이들의 놀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어느 시집에 박힌 시어 하나가 쿵 하고 마음에 박혀서 만들어내는 잔상(殘像)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몸각은 늘 열려 있어서 우주와 만나는 ‘깊은 눈’의 안테나에 다름 아닐 터.

몸을 몬(物)으로 보기도 하지만 빛이 없이 몸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것은 빛이 보여주는 헛(幻)의 헛꼴(幻像)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들이 몬바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빛깔(色色)로 드러나는 것은 빛에 홀린(迷惑) 세계의 풍경을 깊게 보기 때문이리라.    

그의 ‘깊은 눈’은 몸각이 아닌 나머지 넷의 마음줏대에서 미학적으로 전환되어 완성된다. 감각의 세계가 몸에서 마음으로 이어질 때 이미지의 껍데기는 단지 하나의 현상으로 남고 그 속의 ‘뜻앎’(意識)이 알아지면서 뜻알계(意識界)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작품들은 구체적인 구상이 아닌 추상으로 형상화 되었다.

 

#2. 마음속에서 흐르는 느낌의 조각조각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주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자세히 보고 깊게 살피는 일상의 장면들에서 그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렇게 깨달은 깨달음의 실마리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찰이며 깨달음이고 이야기다. 그에게 먼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은 바로 그 이야기들의 조각들이다.

그의 작품들이 주로 콜라주 드로잉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도 이야기의 조각조각을 이어 붙일 수 있는 가장 적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을 타고 들어와 마음에 쌓이는 이미지들은 형상을 짓고 일으키는 창조적 불씨와 다르지 않다. 그는 마치 하나의 세계를 조립하듯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을 오리고 붙이고 떼고 돌리면서 그가 받은 느낌의 꿍꿍(想像)과 꿈꿍(夢想)이 색색의 빛깔로 세워지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빛깔의 풍경화 같고, 빛깔의 기념비 같고, 빛깔이 빛깔을 낳고 새로운 빛깔이 되고, 다시 빛깔을 이루는 빛깔들의 세계 같다.

빛깔로 피어서 환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앎(想)은 그의 마음이 그리는 이 세계의 황홀한 생명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살아 오르는 산숨(生命)의 싱싱한 무늬들로 꾸며진 콜라주 드로잉인데, 달리 보면 그 콜라주 드로잉은 해와 달이요, 크고 큰 숲이며, 나무들이고, 곤충들, 바람, 물, 섬이다. 그는 배역을 캐스팅하듯이 작품을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캐스팅한다. 그런 다음 캐스팅한 요소들의 조각들을 하나씩 이어 붙여서 추상적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품들이 전시공간에 설치될 때 그저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빈 공간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작품들은 ‘관람’의 대상을 넘어서서 체험되어지는 상호작용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공간에서 작품과 관객은 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추상적인 이미지는 구체적인 체험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짓고 일으키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드로잉의 선들은 움직임이다. 곧장 그은 직선과 구부러진 곡선과 뒤흔들리는 포물선과 지그재그와 액자틀과 잘려나간 선들조차도 다 살아서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그의 선과 색은 움 솟아 돌아가는 움돌(氣運)이요, 두루두루 살아서 숨 돌리는 산숨이라 할 것이다.

 

#3. 어렴풋하게 떠돌아다니는 사유의 배치

그는 입주 작가 릴레이 프로젝트 영상 인터뷰에서 “콜라주 드로잉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어렴풋하게 떠돌아다니는 사유나 관념들을 배치하여 그것들의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섯 꾸러미의 마지막은 정신이 늘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채는(識)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그 안에 있다. 몸의 그물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의 그물이 세상을 보는 눈이 된다. 그물의 벼릿줄을 당겨서 콜라주 드로잉을 그릴 때 잡혀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그물코에 꿰진 것들이다. 그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물코의 크기가 이미지의 크기와 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그물코의 크기를 촘촘하게 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반의 추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비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이미지의 단순화는 그의 작품과 상관없다. 그의 추상은 이미지의 실존적 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이미지는 추상이긴 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추상으로 쓴 현실주의(혹은 추상으로 쓴 주관적 초현실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현실주의든, 주관적 초현실주의든 그가 콜라주 드로잉으로 보여주는 낱낱의 이미지는 색의 무늬이면서 현실의 무늬이다. 이야기의 무늬이고 은유의 무늬이며 생각의 무늬다. 모든 이미지는 현실이라는 이 세계로부터 피어올라 그의 마음에 쌓인 것들이다. 처음엔 어렴풋한 것들이 드로잉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하면서(發話) 제 꼴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선경의 작품들은 선명하다. 싱싱하다. 튀어나와서 꿈틀거리고, 퉁겨져 휘감아서 오르내린다. 어딘가에 다다라서 멈추고, 둥글어지다가도 갑자기 날카로워진다. 기지개를 켜듯이 줄곧 당기는 곳에서 익살을 부린다. 달아올랐다가 가라앉고 힘차게 치솟다가 둘레를 쓰다듬는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가 수줍어하듯 내 보이고, 드센 떨림으로 미끈하게 내딛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있다.

 

2021년 그는 개인전 <BONUS LIFE>의 서문을 대신하는 ‘심해로부터 온 편지’를 공개했다. 그 편지에 인용한 이상의 <최후>는 이렇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문단 : “온힘을 다해 파르르 떠는 생의 의지가 갑자기 탈을 바꾸어 공포로 다가온 적은 없는지. 대낮의 먼지를 훔쳐보다 마주친 그 찰나의 표정이 너무도 경이로워 두렵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그의 다섯 꾸러미 감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깊은 눈의 눈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