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빛 속에서 부유하는 색채

이성휘 ( 큐레이터, 하이트컬렉션 )

 

지선경의 작업은 빛과 색채를 통해 일상 속 장면과 내면의 인상을 추상적으로 시각화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콜라주, 회화, 입체,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며, 평면과 입체, 공간과 환경의 경계를 흐트리는 실험을 한다. 특히 빛이 사물과 공간을 인지하는 것에 영향을 주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형태와 색, 그리고 움직임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지 탐구한다. 이 글에서는 작가의 지난 4-5년 간 작가가 보여준 작업의 맥락을 짚으면서 최근 열린 사루비아 개인전에서의 시도와 성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체로 지선경의 작업은 일상이라는 범주 내에서 시작된다. 일상은 매우 광범위하지만, 당사자인 지선경에게는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러한 일상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언어로 서술 가능한 사건이나 고정적인 장면들보다 자신의 정동이 작동된 장면이나 순간들이고,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다. 지선경이 일상에서의 정동을 추상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에게 일상은 끊임없이 심상을 흔들고 기억을 겹치면서 서로 관계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일상을 시각화 하는 방법에는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사건이나 감정을 서술하는 등 여러가지 관점과 방법이 있겠지만, 작가의 시선과 마음이 기우는 것들은 시각적으로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기보다는, 일시적이거나 유동적이고 시공간에서 서로를 투과하는 것들이기에,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관조한 것을 복제나 재현을 뛰어 넘어 조형과 리듬을 통해 단순화하면서 변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종 작가의 심상이 작동된 단서가 작품 제목에 반영되곤 하는데, 작가가 펼치는 시각언어는 기하학적으로 추상화된 조형과 다양한 색채로 완전히 전환되어 있다. 

 

지선경은 먼저 감정이라는 주관적 양태를 추상이라는 시각 언어로 전환하기 위해서 조형 요소와 색채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민하였다. 그의 <bring about(___)>(2019) 작업은 욕망, 기쁨, 슬픔을 기본적인 감정의 세 요소로 설정한 후, 연관된 45가지 감정까지 포함하여 총 48가지 감정을 종이를 사용한 콜라주 및 드로잉으로 진행하여 설치한 작업이었다. 이 48가지 감정은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감정에 대한 사유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우선 욕망,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 감정의 레이어를 설정하고, 이를 확장하여 연관된 감정들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는 개별 감정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상호작용하며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고, 이를 여러가지 색상의 종이를 자르고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콜라주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48가지의 감정 외에도 드로잉을 추가해 전체 100개의 종이 작업을 제작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발견된 형태를 바탕으로 작업 요소 사이에서 관계를 만들어, 이를 직관적 제스처를 통해 발현된 조형 요소와 조화를 찾으며 의도하지 (않은) 형상을 연속적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전시로 선보일 때는 동네 세탁소의 전형적인 옷걸이 방식을 차용해서 드로잉을 비닐 속에 넣어 행잉 설치하고 관람객들에게 꺼내 보게 했다. 이는 드로잉들 간의 시각적 표현의 차이를 경험케 하는 과정이 된 셈인데, 관람자가 마음에 드는 드로잉을 선택하는 일은 드로잉의 조형성과 색상에 대해 주체적인 판단을 하는 과정이 수반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후 지선경은 주재료를 종이로 사용하면서 아크릴, 철사, 나무판 등 다양한 재료들과 기법을 뒤섞은 드로잉 콜라주와 설치 작업을 지속하였다. 《Cast》(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1),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23), 그리고 《녹색갈증》(온수공간, 2024)에 이르는 일련의 전시들에서 그는 공간을 거대한 캔버스 삼아 일련의 드로잉과 오브제들을 설치하였다. 앞서 언급한 <bring about(___)>가 전시에서는 관람객의 수행성이 요구되었다면, 이후 작업들은 공간상에서의 관계성, 그리고 이를 지각하는 방식이 고려되었다. 예를 들어 <Luck>(2021)은 철사, 레진, 회전판 등의 재료를 이용한 바닥 설치 작업인데, 이 작품을 《Cast》라는 전시에서 선보일 때 작가는 회전판 부분과 휘어진 철사 부분을 거리를 띄워 배치하였다. 작가는 사방이 흰색으로 마감되어 있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장을 3차원 캔버스로 상정하고, 공간상에서 오브제들 간의 관계와 질서, 리듬을 살피면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오브제는 작가가 일상에서 포착한 개별적인 순간의 지각과 기억을 반영하고 있지만, 이 오브제들이 현재 시점에서 전시장에 모임으로써 새로운 관계성과 장면을 만드는 것이기에 관람자에게 어떤 정동을 일으키는가가 중요해졌다. 따라서 작가에게는 공간적 관계성 외에도 과거가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되는 시간성 또한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그는 마치 어느 순간 불현듯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떠올라 현재에 뒤섞이는 것처럼 개별 오브제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전시를 통해서 동시다발적인 기억과 경험으로 재구성한다. 예컨대,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물리적 이동이 잦았던 시절의 작가의 고민과 사유를 세 개의 방을 사용하여 표현한 전시인데, 작가는 각 방의 성격을 색조, 흐름, 감정으로 구분하였다. 다양한 색과 날카로운 추상적인 조형은 심리적 불안감이나 문화적 차이에 대한 현기증을 표현하기에 충분했고, 반복적인 리듬으로 정교하게 만든 조형적인 흐름은 이를 다스리기 위해 심리적 유연성이 요구되었던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작가는 일련의 알루미늄판을 평판 커팅하여 바닥에 낮게 설치하였는데, 이모티콘 형태로 그려진 얼굴 표정들을 벽면 투사한 작업은 감정의 다양한 양상을 해학적으로 나타내었다. 전체적인 구성은 여러 시간대의 감정과 기억을 동시적인 사건처럼 펼쳐 놓는 방식이었다. 이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기에 회상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이를 시각화 하는 행위는 현재의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현재적인 사건이다. 마치 공간을 침투하여 스미는 빛처럼(이 전시에서 작가는 조명을 빛이 공간을 침투하는 것처럼 사용했다) 작가의 과거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사유가 현재 공간에서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녹색갈증》(온수공간, 2024)에서도 지선경은 빛의 투과 작용을 시각적으로 더욱 가시화했다. 이 전시에 선보인 ‘초월맘보’ 시리즈는 자연을 빛과 색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것이고, 작가는 스핀, 중첩, 대칭과 같은 자연법칙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개념과 용어를 응용하여 빛과 색의 움직임을 그래픽 이미지로 시각화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시각화의 요소를 정량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오히려 우연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핸드 프린트 기법을 사용하고, PVC 인쇄도 사용하였다. 또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을 활용하기 위해 유리창에 노란색 투명 시트지를 부착하여 실내 공간에 빛이 투과되는 것이 가시화 되게 하였다. 자연 상태의 빛을 가시화하는 일이 어려운 만큼, 작가는 빛이 색이 덮힌 유리를 투과할 때 공간상에 색조를 드리울 수 있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이번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4)에서 지선경은 이제는 그의 특징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이 드로잉, 콜라주, 회화, 입체를 공간상에서 유연하게 펼치면서도 관람 시점의 변화와 동선 유도를 통해서 전시가 열린 사루비아 공간을 색다르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 전시는 작가가 전부터 해온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이나 내재된 인상을 추상적인 조형 언어로 재구성하는 시도면서, 실제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감각과 정서를 주어진 전시 공간에 새롭게 투영하는 실험이기도 했다. 역시 빛과 색채를 공간상에서 이용하는 방법이 입체 설치와 동시에 운용 되었고, 한편으로는 서사가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는데 이는 긴 문장의 전시제목 뿐만 아니라 각 작품의 제목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일례로 벽면에 부착된 레일을 따라 캔버스가 움직일 수 있게 만든 <이동하는 태양>(2024)은 캔버스의 운동성뿐만 아니라 작품 표면의 다이내믹한 패턴과 리듬, 붉은 계열의 색상이 전체적으로 태양의 움직임을 지시하였다. <싱싱딸기(Sing Sing Strawberry)>(2024)는 핸드 프린트 기법과 다양한 회화적 재료로 구성된 입체이지만, 제목과 작품 속 일부 형상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심상 중 일부는 딸기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Sing’과 ‘싱싱한’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싱싱’을 제목에 사용한 것은 작가의 심상을 다층적으로 드러내는 적극적인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만약 이 작품에 <무제>라는 제목이 부여되었다면 우리는 작가의 생각을 훨씬 더 멀리에서부터 유추해야 했을 것이다. 작품 제목이 대상에 투영된 작가의 감정과 감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큰 단서가 된다는 점은 이 전시가 이전 전시들과 좀 더 구분되는 점이었다. 한편, 작가의 조형 탐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 제목도 있다. 전시장 중앙부에 위치한 <겹친 원>(2024)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조각들이 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조형적 질서를 이루는 과정에 대한 탐구다. 이 작업은 이전 작업의 부산물이나 수집해온 종이 조각들, 주위에서 주운 파운드 오브젝트들이 하나의 구조로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루비아 전시장 바닥을 좌대 삼아 구축되어진 이 작품에 대해서 작가는 작업의 최종 20%는 전시장 환경에 맞춰 조율되었다고 말한다.

이 전시는 <겹친 원>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전시장 바닥에서부터 수직 방향으로 구축되는 경향이 강해서 관람자의 시선 높이를 아래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모든 작품은 격자가 그려진 사루비아의 바닥이라는 일종의 좌대 위에 놓였다. 이 바닥의 격자는 관람자가 입구에서 들어섰을 때는 마치 가상 공간에 그려진 그리드와 같은 역할을 하여 각 작품들이 좀 더 그래픽적인 오브제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후 관람자가 전시장 공간을 배회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상 공간 안으로 들어와 오브제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관람자가 작품들 사이를 배회하면서 작품의 면면을 확인하는 과정은 일종의 3D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서 상하좌우로 시점을 바꿔가며 가상 공간 속 오브제의 면면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게 했다. 또 작품들은 2D, 3D 그래픽 프로그램 상에서 만들어진 조형들에 작가가 현실의 물성을 부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시제목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는 주관적인 감정의 양태이기보다는 구체적인 해프닝이나 이벤트를 암시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전시된 작품 일부를 인용하면서도 서로 상관없는 단어와 구절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는 그간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 심상을 감각과 감정을 규정하는 추상적인 개념의 언어를 경유하여 이를 다시 기하학적인 도형과 색채로 전환해왔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기원이나 작동 방식은 소거되고 각각의 오브제로 분절된 채 전시공간에 파편처럼 뿌려지게 된다. 그러나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와 같이 하나의 상황으로 제시된 전시제목은 공간상에 흩뿌려진 작업들에 다시 큰 맥락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문장은 가정된 상황이나 문학적인 수사처럼 다가오면서도, 마치 <노란방>(2024) 작업이 성긴 거미줄에 투사된 조명만으로도 공간에 노란 색조의 빛 속에 부유하는 색채라는 뉘앙스를 만들기 충분했던 것처럼 전시에 적절한 뉘앙스의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 존 버거

 

위에 인용한 존 버거의 말처럼, 시각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는 작업을 한다. 감정이나 감각과 같이 분명하게 실재하지만 주관적이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에 정동이 작용할 때, 작가는 그 목적지가 어딘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작업이라는 여정을 시작한다. 지선경의 작업도 작가 개인의 경험과 감각으로부터 촉발되지만, 작가로서 지선경이 구축하고자 하는 조형언어는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출발하는 일이자 그 여정 자체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그는 어떤 찰나의 상황이나 변화의 과정을 심상에 담곤 한다. 그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간성이 담지된 비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각언어를 추출하여, 평면이나 입체와 같은 형태로 물질화 한다. 그 과정에서 색채는 빛을 통해 부유하며 시공간의 경계를 투과하게 되고, 추상적인 조형언어도 생생한 활기라는 서사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

 1) 지선경의 「포트폴리오」(2025) 내 작업 설명에서 인용. 

2)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 김현우, 진태원 역(파주: 열화당, 2012), p.15.

이성휘, 《SO.S(Sarubia Outreach & Support) - 지선경》(2024.10.16-11.15, PS 사루비아) 심층비평 평문, 「빛 속에서 부유하는 색채」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

 

황신원 ( 큐레이터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

 

​​

청명한 하늘, 단풍의 빛깔, 강렬한 햇살과 선선한 그늘, 상쾌한 바람과 공기... 가을에는 유독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오감이 어느 계절보다 활발하게 작용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과 조형적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기이다. 가을의 기억과 경험은 자연의 점진적인 변화를 기대하게 만들며, 시각은 심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한다. 익숙한 계절의 변화가 왜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자연의 순환적 질서는 작은 변화와 차이를 가시화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감응시키기 때문이다. 시각은 이렇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넘어 다른 세상,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열어줄 수 있다. 

시각은 빛과 함께 존재한다. 빛은 색채와 형태를 발견하고 시공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 요소이다. 지선경 작가는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투영되는 빛의 이미지를 심미적으로 응시하고 포착하여, 조형적 색채와 형태를 입히고 양감을 만든다. 빛과 그림자는 조형적 착상의 출발 지점이다. 양면성을 지닌 채 공존하는 이 두 가지의 비물질적 요소는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부재를 정의한다. 이로 인해 양화(positive)와 음화(negative)의 이미지가 동시에 발생한다. 작가에게 빛은 양가적인 가치와 개념을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하고, 어둠과 밝음, 존재와 부재, 음과 양, 물질과 비물질, 중력과 무중력, 투명과 불투명과 같은 양가적 가치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밝혀준다. 빛과 어둠은 상대적 시선으로 미세한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작고 보잘것없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명백한 의미를 지닌 것들에 모호함을 덧대기도 한다.

한편, 그림자는 역으로 빛과 대상을 주목하게 만든다. 빛-사물-그림자의 위상을 통해 그림자의 형성 조건과 배경이 되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상정할 수 있다. 채워진 형상과 빈 여백의 공간은 또 다른 조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비움과 채움 간극 사이에서 상대적인 가치가 발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낸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사물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속성이 제거된 순수한 추상적 표상이 된다. 물질적인 대상을 떠나 비물질적인 조형요소로 포착된 색채와 형태는 추상적 구성요소로 유기적인 구성과 연계의 지점을 찾아 나간다.

색채는 형태로 드러나고 형태는 색을 구분한다. 형태와 색채는 여러 관계를 통해 시각적으로 작용한다. 확장과 수축, 전진과 후퇴, 상승과 하강, 상하좌우의 방향성은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 의해 조형적으로 증감된다. 선의 모양과 굵기, 길이, 그리고 선이 시작되는 점과 나아가는 각도, 선의 개수와 연속성, 더불어 선에 적용된 색채, 이 모든 조건들은 선의 조형성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변수가 된다. 색채는 각각의 모든 형태가 지닌 조형성을 극대화한다. 스프레이 분사 기법으로 얇게 뿌려진 색채는 대기의 움직임이 가미되어 가볍고 경쾌하며 독자적으로 발광한다. 또한 색채의 단계적 변화(gradation)는 물감의 표면층과 질감을 자연스럽게 밀착시켜 색의 대비와 채도의 충돌을 완화한다. 

색채와 형태의 조율은 다양한 물성의 재료와 수집된 오브제와 결합되어 한층 더 구체화된다. 투과되고 반사하는 빛의 정도에 따라 여러 차원의 층위에서 다채로운 색채와 동적인 형태가 만나 조절되고 반응한다. 벽면(바닥), 종이, 나무, 끈, 아크릴, 유리, 파이프, (타공)철판, 거울은 투영되는 빛의 정도를 달리하며 다각도의 입체적 공간감을 형성한다. 각각의 재료가 지닌 고유의 질감, 투과율, 반사율, 경도와 탄성의 차이는 빛을 이용한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연출한다. 거울을 통한 다른 시공간의 반사, 뿌연 레이어의 장막, 색유리, 조명의 색온도, 프레임의 효과는 다양한 시각 환경을 열어주며 능동적인 시점의 변화를 유도한다. 물질과 비물질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중심은 색채와 형태가 조응하는 추상적 조형성을 향하고 있다. 사각 평면의 조형적 요소를 주목하던 우리의 눈은, 평면(바닥 또는 벽면)이 배경이 된 공간 속 입체 구조물을 다면적으로 이동하며 바라보게 된다. 다양한 시선의 높이와 각도로 공간을 가로지르며 떠다니는 색채와 형태들은 물리적인 공간과 회화적 공간을 넘나든다. 이차원과 삼차원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이번 전시에서 형태와 색채는 각기 하나의 표현이자 상호작용하는 시각 언어이다. 모든 형태는 평면과 평면 사이를 구분하며, 추상적인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부여한다. 또한 조형적 요소는 주변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하며 상호 영향을 미치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눈은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감각을 뒤쫓는다. 같은 모양과 크기의 반복,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질서, 위치, 방향. 간격, 모든 요소의 중첩과 반복은 패턴을 형성하며 조형적 율동감을 환기시킨다. 조화로운 균형의 상태뿐만 아니라 상충되는 요소들의 불협화음과 단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역동적인 움직임은 발생한다. ‘움직이는 시선’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창의적인 행위이다.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종합되고 구성되었다. 작가의 조형적 원리에 따라 우리의 눈은 단일 요소들을 주시함과 동시에 주변을 통합하여 관계를 규정하고, 일관된 하나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시각은 시공간적 경험이며, 자연의 빛은 시공간을 역동적이고 가변적으로 변화시키는 요소이다. 이로 인해 시각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와 형태를 포착할 수 있고, 시공간의 생성과 소멸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각 언어로 구사된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은 사실 시각 환경(삶의 진리, 자연의 질서)의 한 측면일 뿐이다. 시각 예술가들은 작업을 통해 삶을 매개하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의 삶의 태도와 사고가 작업의 내용과 방식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한편, 감상자는 예술작품을 통해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상상하지 못하는 것,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나에게 없는 내가 몰랐던 감각을 예술작품에서 발견하고 고양시키며 감동한다. 시각예술은 결코 시각의 영역에만 한정할 수 없다. 이미지로 구현된 시각예술은 시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조형적 질서는 작가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시각 언어가 되며, 조화롭게 순환되는 자연의 질서와 조형예술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새로운 질서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은, 예술적 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충분히 온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SO.S(Sarubia Outreach & Support) - 지선경》(2024.10.16-11.15, PS 사루비아) 전시글 

모순의 구멍 넓히기

권혁규 ( 큐레이터, MUSEUMHEAD 큐레이터 )

 

질식하듯 범람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탈-이미지 시대의 징후를 감각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미지를 마주하며 인간은 실제를 감각한다고, 심지어는 결정한다고 착각한다. 한 장의 사진을 손에 넣는 행위와 현재의 수집, 전유의 욕망을 연결하는 오늘 sns 등, 이미지 중심의 각종 온라인 매체는 이러한 착각을, 또 그것의 소비주의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한다. 누군가는 여기서 식민화된 소비 영역으로 전환된 이미지를 말할지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박탈된 이미지의 현주소를 진단할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는 이미지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제 아무리 강한 호소와 메시지를 갖는 이미지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전쟁과 재난, 고통의 이미지가 무기력하게 소비되는 오늘 이미지가 분열된 세계와 다시 접촉하고 설득력을 갖는, 나아가 그만의 위대함을 획득하는 장면을 꿈처럼 아득히 그려보기도 한다.   

 

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린 지선경 개인전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이미지의 욕망을 잠시 중단하려는 듯 보인다. 여기서 중단은 앞서 설명한 상실과 불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전시에서 ‘중단’은 그 제목처럼 무언가의 ‘행보’, ‘이동’과 함께한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감각하며 외부와 끊임없이 결합하는, 신체와 감각, 정서를 움직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걷기, 이동하기는 신체적, 감각적 구분이 확정적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가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임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물질과 윤곽에도 불구하고 장소와 시간, 감각의 이동은 새로운 접속과 충돌, 분리와 합체를 만들며 특정 대상을 의문에 부치기도, 또 다른 맥락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은 많은 경우 이미지의 인지와 연동된다. 이동하는 과정 속 이미지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것과의 결합을, 변화의 향상성을 감각하는 세계의 편린을 마주하게 한다. 

‘중단의 이동’은 그 자체로 모순되지만 작가는 이 불합리함을 최대한 멀리 던져보며 그 경계에서 다양한 사고를 발동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사회적 산물임을, 다시 말해 생산되고 활용되는, 금지하고 허용하는, 지배하고 공격당하는 등의 서로 다른 행동의 장이자 토대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시, 전시는 ‘이동’의 개념과 함께 이 복잡한 이미지의 사유와 행동을 특정 시공과 헤게모니에 정박시키지 않고 활성화하길 의도한다. 총 세 부분으로 나눠진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의 첫 번째 파트라 할 수 있는, 전시장 A에 설치된 <Cromatopia/크로마토피아>(2023)는 마치 이미지화할 수 없는 시공의 경험과 흔적, 혹은 예감처럼 다가온다. 경험의 예감, 사태의 흔적이라는 말은 얼핏 잘못된 프로그램 언어처럼 보이지만 작업은 분명 이미지의 표피성과 명확성을 이탈한 일종의 신경세포처럼 또 해체된 기계장치처럼 등장한다. 작가는 “다양한 도시에서 작업하다 남은 종잇조각을 활용해 운동성이 강조된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주로 “색의 배열을 통해 관련 없는 요소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 형태를” 구성하는데 이 프로세스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절단’, ‘채색’, 그리고 ‘연결’의 방법이다. 전시실 A.1의 긴 벽면에 설치된 <Cromatopia/크로마토피아>는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 색이 연결되어 표류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각각의 조각들은 혹은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원본과 복제품의 개념에서 벗어난 어떤 상태로 나름의 이동과 궤적을 형상화해 보인다. 작업을 가로지르는 절단, 채색, 그리고 연결의 방법론은 정형화된 이미지와 물질을 거부하며 충분히 시각화되지 못한, 하지만 기존 이미지의 시각성을, 그 한계를 초과하는 듯한 상태를 구현한다. 물론 이는 특정 경험을 지시하거나 상징하지 않으며 여러 시공을 경유한 복합체의 임무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업은 이미지를 통해 무언가를 연상하고 기억하는 일반적인 인식을, 그 작동을 넘어서는 종합의 프로세스를 실험하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하게 한다. 

이미지의 고유한 작동에 대한 작가의 의구심은 전시장 A.2에 설치된 <Emotionsphere/감정권>(2023)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사람의 다양한 표정도 다원적인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란 질문과 함께 어린 조카에게 사람의 표정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캐릭터처럼 그려진 사람의 표정을 영상으로 옮겨 얇은 천위에 프로젝팅하거나 마치 하수구 커버나 맨홀뚜껑처럼 도심 곳곳에서 볼법한 사물들에 조합해 전시한다. 표정은 인간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입자와도 같다. 하지만 그것은 도시를 걷는 것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며 때로는 무색무취의 상태로 존재한다. 전시장 A.2의 표정들은 무언가의 심적 표상이나 시각적 영사로 다가오기보다 작가의 말처럼 “곰살맞은 나풀거림”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닌 희미한 움직임으로 마치 냄새, 소리, 빛처럼 정해진 대상을 벗어난 상태로 퍼져나간다. <Cromatopia/크로마토피아>가 절단, 채색, 연결의 방식으로 네모난 프레임의 이미지, 그것의 규정성을 거부한다면 <Emotionsphere/감정권>은 얼핏 분명해 보이는 표정, 캐릭터를 알 수 없는 경계와 이동 속에 흔들리는 작은 우주처럼 제시한다. 분명한 시작도 끝도 없이 작은 바람에도 그 모습을 바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정이 떠오르고 또 사라지는 상황은 고정되지 않은 이미지의 세계관을 계속 드러내 보인다.

 

전시장 B에 설치된 <Flowscapes/흐름의 풍경들>(2023)은 캐릭터/이미지의 명시성을 대체하는 이미지의 환상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로 다가온다. 지선경은 이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기호와 그래픽의 작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또 비켜선다. 어떤 기호, 대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체계는 분명한 기호의 명시성뿐 아니라 비기호의 명시성까지 포함한다. 일례로 흔히 말하는 추상화는 그것의 붓질과 색, 소위 말하는 분위기로 특정 정서와 감각을 전달한다. 우리의 모든 직관과 감정은 (추상을 포함한 거의 모든) 현상의 표상과 깊게 관계 맺는다. 인간이 감각하는 것은 어쩌면 본질이 아닌 나타난 현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주변의 현상을 지워버린다면 시공간의 인지마저도 나아가 시공간의 개념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다. 현상이 사라진 혹은 무의미해진 공간에서 인간은 무엇을 감각하게 될까. <Flowscapes/흐름의 풍경들>은 이러한 질문을 한편에 품고 낯익은 표지판과 기호들이 변형시킨 듯 보인다. 전시장에는 같은 형태가 반복, 확장되고 또 반영된다. 작가의 말처럼 “대칭적인 요소, 단일 빛, 점의 변형력 등 움직임의 흐름”이 목격된다. 이 공간에서 특정 캐릭터, 기호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작동하는지의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마치 판타지 소설 속 허구의 장면처럼 그 자체로 의미망을 교란시키고 또 구축하려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이미지, 물질들을 착각으로 혹은 상상으로 부르겠지만 그것은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떤 목적을 위해 소모되길 거부하며, 제공되고 사육되는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말이다. 

《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분명 수단으로 존재하고 소비되는 등의 합목적적 용도에서 벗어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선경의 작업은 이미지의 또 다른 탄생을 의도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성패로 논의될 수 있을까. 작가는 도구에게 탄생이 없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는 듯하다. 도구는 만들어지고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수단과 목적으로 파악된다. 지선경의 작업은 이미지의 수단과 목적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이동하고 흔들리는, 가려지고 소거되는, 반복되고 확장되는 작업은 이미지로 무언가를 명료하게,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일종의 오류로 전환시키려 한다. 그리고 이는 미술/전시의 오랜 질문이자 모순을 떠올리게 한다. 토니 스미스(Tony Smith)는 이동의 경험에 빗대어 미술/이미지가 실제를 제한한다고 말했다. “어두운 밤, 먼 곳에 언덕이 있고, 건초더미나 탑, 불길, 갖가지 색의 등이 드문드문 나타날 뿐인 들판에 캄캄한 포장도로만이 뻗어 있었고 어떤 표지나 등도 없었다. 그날의 여행은 무언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경험이었다. 길과 대부분의 풍경은 인공적인 것이었으나, 그래도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예술이 결코 해낼 수 없는 무언가를 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그 영향으로 인하여 내가 예술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표현된 적이 없는 현실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스스로 그것이 예술의 종말임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제한된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나려는 미술의 시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제한된 (전시)공간에 정지된 이미지와 물질로, 특정 행위로 수렴되곤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미술의 모순이며 해소 불가능한 욕망을 드러낼 뿐인가. 지선경 개인전《Drunkard’s Move: 술고래의 행보》는 줄곧 ‘도시’ 공간을 ‘이동’의 배경으로 설정한다. 작가의 말처럼 다양한 도시에서 얻은 재료로 도시의 물질과 이미지 기호와 그래픽을 재구성한다. 앙리 르페브르 (Henri  Lefebvre)의 논의처럼 더 이상의 투쟁과 혁명이 불가능한 식민화된 공간/도시에서 그것의 재발견을, 또 다른 생산과 권리의 주장을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이미지를 둘러싼 시도의 모순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전시 제목은 “무작위 분자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임의적인 움직임의 경로를 설명하는 수학 용어”, ‘술고래의 걸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적 장소를, 실재하지 않지만 다녀온 것으로 상정하고” 제목을 붙였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전시장에서 외부를 열망하는 해결 불가능한 미술의 욕망은 여전히 그 경계를 확장하며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있다. 누군가는 모순이라 말할 그 작은 구멍에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쉽게 소비되지 않는 형상을 비추는 것이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것은 아닐까. 정지된 것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일종의 사건으로서 작품과 전시를 마주하면서 말이다. 

Expanding the holes of contradiction

Hyugue Kwon (Curator of MUSEUMHEAD)

It is ironic to sense the signs of the ‘post-image’ era among images overflowing as if to stifle us. Facing images, we delude ourselves that human beings sense reality and even make decisions about it. Various online media focused on images, such as social media sites connecting the act of obtaining a photograph and the present desire of collection and appropriation, reveal such delusion and its consumerist nature explicitly. Here, some may mention images converted to colonialized consumption or diagnose the current status of deprived images that cannot run properly. It is clear that we are getting insensitive to images. Even those with strong appeals and messages often pass without causing major repercussions. Today, as images of wars, disasters, and pains are consumed listlessly, one imagines, as if in a dream, a scene where images resume contact with the fractured world, regain persuasiveness, and achieve their individual greatness. 

Drunkard’s Move, Ji Sunkyung’s solo exhibition held at the Artist Residency TEMI, appears to try to suspend the desire of images for a while. Suspension here may be an act of partially admitting the loss and impossibility explained above. ‘Suspension’ in this exhibition goes side-by-side  ‘move’ and ‘transfer.’ To walk is also to traverse time and space while continuing to connect with the outside, and to transfer the body, senses, and emotions. Therefore, walking and transferring let us feel that physical and sensitive differentiations are not definite realities but subjects that variably exist according to external conditions and surrounding environments. In spite of concrete substances and outlines, transfers in time, place, and senses generate new connections and collisions and divisions and combinations, while bringing specific objects to question or regenerating them in different contexts. This process is usually associated with the perception of images. Images in the process of transfer bring us to encounter the union between things heterogeneous and hostile as well as parts of the world that sense the incrementality of changes. 

Whereas ‘transfer of suspension’ is contradictory in itself, the artist throws away this irrationality as far as possible, arousing a variety of thoughts at the boundary. This is to recognize that an image is a social outcome, or a place and foundation of disparate acts of producing and utilizing, prohibiting and allowing, dominating and attacking, and so on. Again, the exhibition intends to activate thinking and acting of this complex image along with the concept of ‘transfer’, and not to limit them to specific time-space or hegemony. Cromatopia (2023), which can be seen as the first part of Drunkard’s Move consisting of three parts, approaches viewers as experiences, traces, or premonitions that cannot be put into images. Expressions like premonitions of experiences and traces of events appear as if they are wrong program terms, but the work emerges looking like a kind of nerve cell or broken-up mechanical device that has done away with the superficiality and clarity of an image. The artist creates “a scene emphasizing mobility by using paper scraps from works in numerous different cities.” She mainly composes “forms by creating relationships among unrelated elements through color arrangement,” and in this process, the ways of ‘cutting off,’ ‘coloring,’ and ‘connecting’ especially draw attention. Cromatopia installed on the long wall of the exhibition hall A.1 shows different shapes, sizes, and colors linked with one another and drifting. Here, individual pieces or residues represent their respective transfers and traces in a certain state of having broken away from the concepts of original and duplicate, in different individual ways. The methodologies of cutting off, coloring, and connecting traversing the work reject standardized images and substances and realize a state that has not been fully visualized but seems to transcend the visuality or limitations of existing images. Surely this does not indicate or symbolize specific experiences or impose complex duties by way of multiple space-times. Rather, the work leads us to suppose that its intention may be to test the comprehensive process, beyond general perceptions of association and remembrance as well as their operations, through images. 

The artist’s uncertainties about the inherent operations of images manifest a little more clearly in Emotionsphere (2023) installed in the exhibition hall A.2. Questioning, “Isn’t it possible to interpret a person’s diversified expressions in pluralistic images?,” the artist asked her young nephew to draw a person’s expressions. Afterwards, she projected the personal expressions – drawn like those of an animation character – on thin cloths or added them to objects commonly seen in a city center, such as a manhole cover, for the exhibition. Facial expressions are like particles that give us hints about a person’s conditions. However, they change all the time as if we are walking in the city and sometimes exist in a colorless and odorless state. Facial expressions in the exhibition hall A.2 exist merely as “affectionate flutters” as the artist says, rather than approaching us as mental representation or visual projection of something. Here, images are not fixed but break away from set objects and spread like smells, sounds, or light as faint gestures. If Cromatopia rejects rectangular framed images and their regulations based on the methods of cutting off, coloring, and connecting, Emotionsphere presents the expressions or characters that appear to be clear as small universes fluttering in unknown boundaries and transfers. The context without definite start or ending, which keeps changing its looks in little winds as countless expressions appear and disappear, continues to expose a worldview of unfixed images. 

Flowscapes (2023) displayed in the exhibition hall B approaches viewers as an attempt to expand the illusions of images replacing the explicitness of characters/images. Ji in this process attentively looks at the works of signs and graphics and then stands aside. The reason for being able to figure out the meanings of certain signs or objects may be because they belong to the meaning system. Here, the meaning system embraces not only the explicitness of signs but also that of non-signs. For example, abstract paintings deliver specific emotions and senses through brushworks, colors, and so-called moods. All of our intuitions and feelings form deep relationships with the symbols of most phenomena (including abstraction). What people sense may be merely phenomena that appear, and not the essence. If we erase phenomena that surround us, we may face a situation where the perception, or even the concept of time-space disappears. What will people sense in a space where phenomena have disappeared or become meaningless?  Flowscapes, where familiar signs and notices have been transformed, seems to harbor this question. Identical forms appear repeatedly, expanding and being reflected, in the exhibition hall. In the artist’s words, “flows of transfers, such as symmetrical elements, a single light, and deforming force of dots” are observed. In this space, the discussion on whether certain characters and signs actually exist or operate becomes impossible. This is because it is attempted to disturb and rebuild the semantic network as if in a fictional scene in a fantasy novel. Some people may call these images and substances as delusions or imaginations, but they may be just existing like that, refusing to be consumed for certain purposes and seeking the possibility of being existences other than being offered and raised. 

Drunkard’s Move recalls images that have moved away from the rational functions of existing and being consumed as means. Can we conclude that Ji Sunkyung’s work intends rebirth of images? Can we decide whether she succeeded or failed? The artist seems to clearly understand that there is no birth for tools. Tools are just built and used. They are understood as means and purposes. Ji’s work reveals strong uncertainties about the means and purposes of images. The work that transfers and falters, gets hidden and eradicated, and is repeated and extended tries to convert the belief about being able to differentiate something clearly and distinctly based on images as a kind of error. And this brings back an old question and irony in art/exhibition. Tony Smith said art/image limits reality based on the experience of transfer. “It was a dark night and there were no lights or shoulder markers, lines, railings, or anything at all except the dark pavement moving through the landscape of the flats, rimmed by hills in the distance, but punctuated by stacks, towers, fumes, and colored lights. This drive was a revealing experience. The road and much of the landscape was artificial, and yet it couldn’t be called a work of art. On the other hand, it did something for me that art had never done. At first, I didn’t know what it was, but its effect was to liberate me from many of the views I had had about art. It seemed that there had been a reality there which had not had any expression in art… I thought to myself, it ought to be clear that’s the end of art.” 

  Artistic attempt to get away from limited forms and contents, both in the present and past, has tended to converge on suspended images, substances, and certain actions in limited (exhibition) space. Is this a contradiction of art that reveals insatiable desire? Ji’s solo exhibition Drunkard’s Move continues to set ‘urban’ spaces as backgrounds of ‘transfers.’ As the artist said, she uses materials gathered in various cities to reconstruct signs and graphics for urban substances and images. As Henri Lefebvre argued, isn’t it an attempt at the rediscovery and assertion on other productions and rights in the colonized space/city where struggles and revolution are not possible anymore? In this context, how about reading the contradiction in the artist’s attempts around images? The exhibition title is derived from ‘the drunkard’s walk,’ which is “a mathematical term explaining the process of random molecules continuously bouncing off one another, as well as the path of randomized movements.” The artist said that she came up with the title, “presuming to have visited an unreal, fictional place”  that she made up. The aforementioned insatiable desire of art, longing for the outside from the exhibition hall, is extending its boundary and making holes here and there. Isn’t the exhibition suggesting reflection of shapes that are not reverted to means or easily consumed in the small holes, which may be called contradictions by some people? That is, not the suggestion of something suspended but encounter of the works and the exhibition as an event transcending it.

--------------------------------

 1) See Michael Fried, Art and Objecthoo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98

 2)  See Henri Lefebvre, translated into Korean by Yang Yeon-ran, Production of Space, ecolivres, 2011. 

 3)Excerpts from the artist’s note written in 2023. 

빛의 그물로 짠 조각들 - 지선경이 그리는 조형미학의 그물코

 

김종길 | 미술평론가

 

#1. 주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에의 ‘깊은 눈’

그는 감각의 다섯 꾸러미(五蘊)에 충실한 예술가다. 불교에서 다섯 꾸러미를 빛(色)․받(受)·꿍(想)·가(行)·알(識)이라 한다.

빛은 몸을 드러낸다. 그래서 몸을 몬바탕(物質)의 상징으로 본다. 나머지 넷은 마음줏대(精神)의 상징이다. 몸의 그물코인 마음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 받은 느낌이 꿍꿍(想像)과 꿈꿍(夢想)으로 피어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앎(想), 하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챔(識)으로 이뤄진다.

그가 다섯 꾸러미에서 가장 재빠르게 느끼는 감각은 몸(色)인 듯하다.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며, 또 촉각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닿는 몸각(身覺)의 반응들은 아주 예민해서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언제나 돌이켜 살폈으리라. 그러니 작업의 시작은 몸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실마리가 아닐까. 그리고 그 실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바람의 이야기로, 곤충들의 이야기로, 달의 이야기로, 집집 우주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예컨대 그것은 낮게 흐르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잔물결일 수 있고, 스치듯 지나가는 어떤 장면들이 먼 기억으로 이어져서 일으키는 아이들의 놀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어느 시집에 박힌 시어 하나가 쿵 하고 마음에 박혀서 만들어내는 잔상(殘像)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몸각은 늘 열려 있어서 우주와 만나는 ‘깊은 눈’의 안테나에 다름 아닐 터.

몸을 몬(物)으로 보기도 하지만 빛이 없이 몸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것은 빛이 보여주는 헛(幻)의 헛꼴(幻像)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들이 몬바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빛깔(色色)로 드러나는 것은 빛에 홀린(迷惑) 세계의 풍경을 깊게 보기 때문이리라.    

그의 ‘깊은 눈’은 몸각이 아닌 나머지 넷의 마음줏대에서 미학적으로 전환되어 완성된다. 감각의 세계가 몸에서 마음으로 이어질 때 이미지의 껍데기는 단지 하나의 현상으로 남고 그 속의 ‘뜻앎’(意識)이 알아지면서 뜻알계(意識界)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작품들은 구체적인 구상이 아닌 추상으로 형상화 되었다.

 

#2. 마음속에서 흐르는 느낌의 조각조각   

그는 사람들에게 거의 주위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자세히 보고 깊게 살피는 일상의 장면들에서 그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렇게 깨달은 깨달음의 실마리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찰이며 깨달음이고 이야기다. 그에게 먼저 바깥으로부터 받아 느껴 일으키는 하고픔(受)은 바로 그 이야기들의 조각들이다.

그의 작품들이 주로 콜라주 드로잉의 형태로 등장하는 것도 이야기의 조각조각을 이어 붙일 수 있는 가장 적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을 타고 들어와 마음에 쌓이는 이미지들은 형상을 짓고 일으키는 창조적 불씨와 다르지 않다. 그는 마치 하나의 세계를 조립하듯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을 오리고 붙이고 떼고 돌리면서 그가 받은 느낌의 꿍꿍(想像)과 꿈꿍(夢想)이 색색의 빛깔로 세워지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빛깔의 풍경화 같고, 빛깔의 기념비 같고, 빛깔이 빛깔을 낳고 새로운 빛깔이 되고, 다시 빛깔을 이루는 빛깔들의 세계 같다.

빛깔로 피어서 환한 눈뜸으로 두루 번지는 앎(想)은 그의 마음이 그리는 이 세계의 황홀한 생명들이다. 그의 작품들은 살아 오르는 산숨(生命)의 싱싱한 무늬들로 꾸며진 콜라주 드로잉인데, 달리 보면 그 콜라주 드로잉은 해와 달이요, 크고 큰 숲이며, 나무들이고, 곤충들, 바람, 물, 섬이다. 그는 배역을 캐스팅하듯이 작품을 위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캐스팅한다. 그런 다음 캐스팅한 요소들의 조각들을 하나씩 이어 붙여서 추상적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품들이 전시공간에 설치될 때 그저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빈 공간의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작품들은 ‘관람’의 대상을 넘어서서 체험되어지는 상호작용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공간에서 작품과 관객은 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추상적인 이미지는 구체적인 체험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짓고 일으키는 짓짓이 꼴짓으로 나아가면서 드러내 이루는 움직임(行)일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드로잉의 선들은 움직임이다. 곧장 그은 직선과 구부러진 곡선과 뒤흔들리는 포물선과 지그재그와 액자틀과 잘려나간 선들조차도 다 살아서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그의 선과 색은 움 솟아 돌아가는 움돌(氣運)이요, 두루두루 살아서 숨 돌리는 산숨이라 할 것이다.

 

#3. 어렴풋하게 떠돌아다니는 사유의 배치

그는 입주 작가 릴레이 프로젝트 영상 인터뷰에서 “콜라주 드로잉을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어렴풋하게 떠돌아다니는 사유나 관념들을 배치하여 그것들의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다섯 꾸러미의 마지막은 정신이 늘 깨어서 몸­마음­세상이 한 그물로 이어져 있음을 알아채는(識)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그 안에 있다. 몸의 그물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의 그물이 세상을 보는 눈이 된다. 그물의 벼릿줄을 당겨서 콜라주 드로잉을 그릴 때 잡혀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그물코에 꿰진 것들이다. 그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물코의 크기가 이미지의 크기와 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해상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그물코의 크기를 촘촘하게 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초반의 추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비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이미지의 단순화는 그의 작품과 상관없다. 그의 추상은 이미지의 실존적 뼈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이미지는 추상이긴 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추상으로 쓴 현실주의(혹은 추상으로 쓴 주관적 초현실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현실주의든, 주관적 초현실주의든 그가 콜라주 드로잉으로 보여주는 낱낱의 이미지는 색의 무늬이면서 현실의 무늬이다. 이야기의 무늬이고 은유의 무늬이며 생각의 무늬다. 모든 이미지는 현실이라는 이 세계로부터 피어올라 그의 마음에 쌓인 것들이다. 처음엔 어렴풋한 것들이 드로잉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하면서(發話) 제 꼴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선경의 작품들은 선명하다. 싱싱하다. 튀어나와서 꿈틀거리고, 퉁겨져 휘감아서 오르내린다. 어딘가에 다다라서 멈추고, 둥글어지다가도 갑자기 날카로워진다. 기지개를 켜듯이 줄곧 당기는 곳에서 익살을 부린다. 달아올랐다가 가라앉고 힘차게 치솟다가 둘레를 쓰다듬는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가 수줍어하듯 내 보이고, 드센 떨림으로 미끈하게 내딛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있다.

 

2021년 그는 개인전 <BONUS LIFE>의 서문을 대신하는 ‘심해로부터 온 편지’를 공개했다. 그 편지에 인용한 이상의 <최후>는 이렇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문단 : “온힘을 다해 파르르 떠는 생의 의지가 갑자기 탈을 바꾸어 공포로 다가온 적은 없는지. 대낮의 먼지를 훔쳐보다 마주친 그 찰나의 표정이 너무도 경이로워 두렵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그의 다섯 꾸러미 감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깊은 눈의 눈뜲!

Ⓒ 2014-2025 Sunkyung Ji. All right reserved.

<a href="http://www.onlinewebfonts.com">Web Fonts</a>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