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없는 계절》, 2026 9월 어느 날, 더위 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잠깐 지나갔다. 무성한 잎과 잎 사이로 낯선 온도가 잠시 고였다 흩어졌다. 바람이 그치자 다시 더웠다. 우리는 또 가을이 왔다고 말한다. 계절은 돌아온다고 하면서 왜 늙어간다고는 하지 않을까. 오래전에 본 장면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가까워진다. 처음 보는 빛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같다. 바깥의 변화와 그것을 알아차리는 몸의 시간은 어긋나다가도 문득 겹친다. 작업실에서 며칠 전의 선 곁에 오늘의 색을 놓는다. 〈TC, Transient Constellations〉 오후 4시경 작업실 베란다에 빛이 들어온다. 쓰임을 다한 원형 샌딩 페이퍼가 작업대 위에서 돌아다닌다. 어제 온 재료를 감싸던 종이 포장재도 놓여 있다. 종이 조각들을 잘게 잘라 레진에 적신다. 에어브러시와 아크릴 스프레이로 빛이 들어오던 방향을 따라 색을 분사한다. 먼저 생긴 자국 옆에 며칠 뒤의 색이 들어온다. 두세 번의 시간이 한 화면에 놓인다. 레진이 굳은 작은 색 조각과 선, 지우고 남은 자국 사이에 눈이 길을 낸다. 별자리를 볼 때처럼 이어져 있지 않은 것들을 이어 본다. 〈흐르다 만 그늘〉 팔각의 껍질에 멜론이 다 익기 전의 연두가 있다. 색은 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그 아래에는 그림자가 놓여 있다. 과즙처럼 흘러나온 듯하지만 더는 흐르지 않는다. 가느다란 침 하나가 멈춘 자리에 꽂혀 있다. 무엇을 고정하는지, 아니면 이미 굳은 것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껍질은 위에 있고 그림자는 아래에 있다. 둘은 붙어 있는 것 같다가도 서로 다른 사물처럼 보인다. 그림자를 레진으로 굳혀 놓자, 빛이 달라져도 그 형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익지 않은 신호〉 와인 오프너의 나선형 스크루를 거꾸로 세웠다. 무언가를 열기 위해 만들어진 형태라 돌려야 할 방향부터 찾게 된다. 하지만 손을 댈 곳을 찾는 동안 겉의 색이 먼저 보인다. 딸기가 다 붉어지기 전의 색이다. 열매에서는 잠시 지나가는 색인데, 나선 위에서는 그대로 남는다. 〈보호 이후〉 타조알의 껍질과 운반을 마친 포장재가 가까이 놓여 있다. 하나는 생명을 감쌌고 다른 하나는 물건을 받쳤다. 껍질에는 포도를 떠올리게 하는 색이 있다. 운반을 마친 포장재에는 무언가가 놓였던 자리가 남아 있다. 그 위에 타조알의 껍질을 올려놓자, 빈자리가 둥근 면을 따라 꼭 맞게 늘어난다. 전시장 입구에는 피라칸사스 열매를 놓았다. 같은 나무에서 같은 날 가져왔지만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서로 다른 속도로 마르고 색이 달라진다. 그 안쪽에는 레진으로 굳힌 그림자와 여러 날에 걸쳐 만든 화면들이 있다. ※ 제목의 ‘나이없는’은 의도적으로 붙여 쓴 표현입니다.

〈초월 맘보〉, 2024 〈초월 맘보〉는 조경회사 수무가 기획한 전시 《녹색 갈증》(온수공간, 2024)에서 선보인 공간 설치 작업이다. 나는 2층과 3층을 잇는 통로이기도 한 전시 공간을 살피며 작품과 공간을 구상하고 스케치했다. 큰 창으로 빛이 들어와, 그 빛이 어느 쪽으로 흐르고 어디에 닿는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빛이 지나가는 길에서 한 조각을 떼어온 듯한 공간을 구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은 평면 작업 〈Flowscapes〉(2023)에서 시작된 상상과 이어진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 흐름의 한 부분을 잘라 머리 위로 띄운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수없이 많은 인상과 이미지가 교차하고, 도형과 선들은 순간순간 모양을 바꾸며 움직인다. 선은 이어지다 끊기고, 한 점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며, 실제로는 없지만 어딘가 다녀온 듯한 장소를 떠올렸다. 이 공간을 이루는 평면 연작 〈초월 맘보〉(2023) 역시 빛의 한 점에서 출발한다. 점을 늘리고 돌리고 비추어 되돌리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의 한순간을 붙잡는다는 생각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대칭과 회전, 겹침과 얽힘은 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래픽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옮길 때에는 화면의 색을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필름의 순서를 바꾸고 서로 다른 잉크를 겹치며, 손으로 찍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색을 찾아갔다. 같은 이미지에서 출발해도 한 장 한 장에 다른 결과가 남았다. 2024년의 〈초월 맘보〉에서는 이 이미지들이 벽을 넘어 인조 잔디 아래로 이어진다. 바닥 설치 작업 〈Licht Steps〉(2024)에서는 길이 120cm의 인쇄 이미지를 잔디 밑에 두었다.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발밑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잔디는 통로를 따라 걷는 자리이면서, 잠시 앉거나 누워 머무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유리창에는 노란색 투명 시트를 붙였다. 햇빛이 시트를 지나면 통로에 노란빛이 드리워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빛이 닿는 자리와 짙기도 달라진다. 벽의 이미지와 바닥의 겹,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닿고 달라지도록 놓았다. 〈초월 맘보〉는 내가 그려 세운 장소의 이름이다. 한 점에서 시작된 빛을 따라 이미지가 생겨나고, 관객은 그 선을 따라 걷다가 멈추거나 누워 머무른다. ‘초월’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곳을 지나는 빛의 흐름을, ‘맘보’는 그 흐름을 따라가는 걸음의 리듬을 가리킨다. 실제로 움직이는 빛과 눈앞에 펼쳐진 상상의 장소가 이 통로 안에서 잠시 겹치기를 바랐다. 작품 및 공간 구상: 지선경 / 인쇄·인조 잔디 바닥 재료 및 시공 지원: 수무

이동하는 태양, 2024 #SunlitNotes 전시장의 가장 익숙한 규칙인 “손대지 마시오”를 가볍게 비틀어, 닫힌 프레임 위에 “당겨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손잡이를 달았다. 콜라주 회화를 담은 프레임은 서랍처럼 열리고, 관객이 손잡이를 당기면 그 뒤편에 숨겨진 낙서의 층이 드러난다. 이 작업의 작은 브레이크는 프레임 옆에 놓인 메추리알 둥지다. “여기까지만 여시오”라는 건조한 경고문 대신, 나는 그 자리에 작고 연약한 둥지를 두었다. 서랍에 힘이 조금 더 실리는 순간 메추리알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주워 제자리에 올려두곤 했다. 관객은 작은 알 하나를 통해 자신의 손끝에 실린 힘을 문득 알아차린다. 진지한 관람 행위는 아주 사소한 민망함을 지나며 잠시 느슨해진다. 숨겨진 낙서의 층은 내가 머물던 소도시 도서관의 책상 앞 벽면에 빼곡했던 익명의 흔적들과 겹쳐 있다. 누군가의 이름, 첫사랑, 시험을 앞둔 소망 같은 문장들은 내게 낙서라기보다 잠시 기대어 있다 간 마음의 자국처럼 보였다. 이 기억은 사루비아 전시장의 흰 벽을 보는 순간 불쑥 되살아났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공간의 흰 표면이 겹치는 순간, 기억은 논리적인 경로를 비켜가며 낯선 표면에 옮겨 붙는다. 처음에는 서로 무관한 종이 조각들을 겹치다가 우연히 태양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그 이미지가 서랍 안으로 들어가고 관객의 손이 프레임을 열면서, 회화의 뒤편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생겼다. 이 작업에서 이동하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다. 종이 조각은 태양이 되고, 전시장 벽은 도서관의 낙서를 불러오며, 메추리알을 떨어뜨린 관객의 멋쩍은 손끝도 작업 안에 작은 사건으로 남는다.

《 멜랑콜리한 과일, 혹은 환상의 구조 》, 2025 지선경에게 나뭇가지, 과일과 같은 유기적 사물은 오랫동안 관찰의 대상이었다. 생명이 소거된 뒤에도 형태와 시간성이 남아 있는 물질들은 작가에게 비유적 장치이자 감각의 변화를 읽어내는 지표로 기능해왔다. 그중 과일은 특히 지속성을 지닌 대상이었다. 《과일, 야채》(2018-) 시기부터 이어진 이 관심은 특정 도상을 반복하기보다, 일상의 기호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이동하고 변형되는가를 추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과일의 형태, 위치, 가격, 이미지가 변주되는 과정은 감각이 사회적 구조와 접속하는 방식을 드러내며, 작가의 작업에서 하나의 축을 형성해왔다. 독일에서 과일은 계절성과 접근성을 지닌 일상의 대상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체계를 획득한다. 가격의 상승, 선물용 포장의 과잉, 유통된 이미지의 표면성은 한때 자연스러웠던 감각을 낯선 거리감으로 전환시키며, 익숙한 경험이 사회적 기호로 대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전환 속에서 과일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접근이 제한된 풍요, 감각의 소실을 가리는 표면적 장치, 동시대 정서를 반사하는 구조로 자리한다. 《환상의 과일들》은 이러한 감각의 이동—실체가 약해지고 이미지가 우세해지는 흐름—을 조형적 언어로 탐구한다. 스티로폼 포장재와 유통 이미지, 쇼윈도 속 모형들은 실재와 감각 사이의 미세한 틈을 드러내며, 감각적 단서가 어떻게 이미지적 기호로 치환되는지를 재료적 조건 속에서 드러내려는 시도다. 지선경은 과일이라는 일상적 단서를 따라, 동시대 정동(情動)이 어떻게 표면화 되고 동시에 비워지는지를 관찰한다. 유통 이미지로 수렴된 과일의 형태는 감각이 표면적 기호로 축약되는 도시적 조건을 반영하며, 작가는 그 잔여를 색·구조·리듬·반투명 재료의 느린 배열로 다시 구성한다. 이는 사라진 감각의 흔적을 시각적 리듬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감정과 실재의 간극이 확대되는 시대적 조건을 환기한다. 전시는 과일에서 출발하지만, 감각과 이미지, 구조와 지각의 관계로 확장된다. 서로 다른 밀도의 평면·반입체·설치 요소들은 하나의 환경을 이루며, 관객은 단정한 배열 속에서 미세하게 어긋나는 감각의 변위를 따라가게 된다. 이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층위들은 실재가 약해진 자리에서 감각적 현실이 어떻게 조립되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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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 2025 2024년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는 Sarubia Outreach & Support(SO.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이어진 대화와 고민, 작업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나는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국내 미술계의 환경과 네트워크를 새롭게 접하던 시점에 있었고, 드로잉과 입체, 설치를 오가는 작업이 기존의 매체 구분 안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 전시는 완성된 결과를 제시하기보다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서로 다른 형식 사이에서 일어난 조형적 이동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SO.S 과정에서 나눈 대화 가운데 중요하게 남은 제안은 작품을 가능한 한 벽에 걸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일부 드로잉과 프레임이 열리는 작업 〈이동하는 태양〉(2024)을 제외하면, 전시는 벽을 작품의 배경이나 지지대로 사용하는 익숙한 방식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조건처럼 주어진 제안이었지만, 오히려 작업을 풀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벽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은 바닥과 통로, 틈과 높이 사이에 놓였고, 점차 형상과 형상 사이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작업하는 동안 남겨진 조각들이 한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것은 이전 작업의 일부였고, 어떤 것은 미처 작품이 되지 못한 재료였으며, 또 어떤 것은 특별한 목적 없이 작업실 주변을 맴돌던 색과 형태였다. 이 조각들은 그 자체로 분명한 의미나 역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가까이 놓이고, 겹치고, 지탱하고, 비켜서는 동안 이전에는 없었던 형상이 잠시 나타났다. 전시의 기본 단위는 개별 오브제라기보다 오브제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배치와 간격이었다. 설치는 사전에 완성된 계획에 따라 작품을 옮겨놓는 방식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열흘 동안 사루비아 공간에 머물며 벽의 높이와 통로의 방향, 바닥의 넓이와 건축적 여백을 살폈다. 제작해온 작품과 여러 조각을 공간에 연결해보고, 전시장을 작업실처럼 사용하며 그 안에 계속해서 스케치했다. 이미 만들어진 요소들은 다시 배치되고 조정되었으며, 일부는 현장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변형되었다. 처음부터 구조를 세워놓고 즉흥적으로 변주한 것이 아니라, 옮기고 멈추고 다시 바라보는 동안 즉흥적인 선택들이 조금씩 구조를 만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요소가 되었고, 멀리 떨어진 조각들은 특정한 시점에서 잠시 하나의 형상처럼 보였다. 어느 위치에서는 한 작품이 중심에 놓인 듯했지만 몇 걸음 옮기면 그 중심은 다른 요소로 이동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오브제가 독립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서로 가까이 놓였을 때 무엇이 새롭게 발생하는가였다. 색은 옆에 놓인 색에 따라 달라졌고, 형태는 다른 형태와 겹칠 때 전혀 다른 윤곽을 얻었다. 간격과 방향, 높이와 시선이 조각들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작용했다. 전시에 등장한 작품들은 〈겹친 원〉, 〈Everyday〉, 〈이동하는 태양〉, 〈싱싱 딸기〉, 〈언 물〉, 〈밤이 길을 지운다〉, 〈여왕벌 윙윙〉, 〈흰 오리〉, 〈노란 방〉, 〈황금빛 벌통〉 등의 제목을 지니고 있다. 이 제목들은 특정한 대상을 먼저 상정하거나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니었다. 작업은 서로 다른 시간에 남겨진 색과 조각, 표면과 기하학적 파편에서 출발했다. 본래 뚜렷한 의미가 없던 조각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형상처럼 응집되면, 나는 그 안에서 오리나 딸기, 태양과 같은 낯익은 대상을 연상했다. 그러나 그렇게 떠오른 형상은 조각 안에 처음부터 들어 있던 객관적인 의미라기보다, 나의 기억과 감각이 불러낸 주관적인 연상에 가까웠다. 그 연상에 ‘오리’, ‘딸기’, ‘태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개인적인 지각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언어의 분류 체계 안으로 들어간다. 제목은 형상을 정확히 설명하거나 확정하는 말이 아니라, 아직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조합을 잠시 하나의 범주로 붙잡는 이름이었다. 이름이 붙은 뒤에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일어났다. 조각들의 배치가 먼저 말을 불러냈지만, 그렇게 찾아온 말이 다시 조각들을 바라보는 방식과 서로 연결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흰 오리’라고 부르고 나면 이전에는 무관하게 보이던 흰색 조각과 굽은 선이 하나의 몸짓처럼 보였고, ‘이동하는 태양’이라는 제목은 원과 프레임 사이에 방향과 시간의 감각을 만들었다. 형상이 언어를 부르고, 언어가 다시 형상을 조직하는 왕복 운동이 작품 안에서 이어졌다. 전시 제목 역시 개별 작품의 제목들을 이어 붙여 만든 문장이다. 문법적으로는 조금 어긋나 있지만 이미지로는 작동하는 문장, 말이 되는 듯하면서도 끝내 하나의 뜻으로 닫히지 않는 문장이다. 하나의 문장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추어 전시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에 생겨난 제목들이 한곳에 모이면서 뜻밖의 문장이 나타났다. 관련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부딪치고 미끄러지며 잠정적인 관계를 만드는 방식은, 서로 다른 조각들이 공간 안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응집되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는 완결된 개별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라기보다, 분류되지 않은 조각들이 배치를 통해 잠시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이었다. 그 안에서 주관적인 연상은 언어의 분류 체계와 만나 이름을 얻었고, 이름은 다시 조각들의 관계를 움직였다. 전시가 붙잡고자 한 것은 오리나 태양, 딸기라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무관해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놓였을 때 하나의 형상과 감흥이 발생하고 다시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Sarubia Outreach & Support(SO.S) B 그룹은 서울 중심의 미술계 시스템 안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혹은 오랜 해외 체류 이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작가들이 겪는 소통의 한계와 고립감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화와 비평, 포트폴리오 리뷰, 워크숍 등을 제공하는 작가 지원 프로그램이다. 본 전시는 단순한 전시 후원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에서 이어진 대화와 작업 연구의 연장선에서 마련되었다. 관련 노트: 「감각이 구조를 향해 움직이는 방식」, SunlitNotes, 「자유연상, 퍼즐」, SunlitNotes, 2025, 「이동하는 태양: 서랍과 기억의 표면」, SunlitNotes, 2025.

〈Bring About〉, 2019 이 작업은 48가지로 세분된 감정을 각각 한 점의 이미지로 옮긴 48점의 드로잉 연작이다. 이 작업은 감정이 어디까지 개인적인 것이며 어디서부터 문화적으로 학습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독일로 이주한 뒤 나는 같은 감정도 문화에 따라 이를 가리키는 단어와 몸의 제스처, 반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경험했다. 이후 감정을 표현하는 일뿐 아니라 감정을 이름 붙이고 분류하는 방식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욕망·기쁨·슬픔이라는 세 기본 감정에 서로 다른 색과 형태의 레이어를 설정한 뒤, 나머지 감정의 정의를 읽으며 떠오른 선과 면을 조합했다. 색지와 트레싱지를 자르고 겹친 뒤 아크릴 스프레이를 분사하는 과정에서 계획한 형태와 우연히 생긴 자국이 함께 남았다. 한 감정의 종이 조각과 색의 레이어는 다른 화면으로 이동하고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감정들은 분리된 이미지로 고정되지 않고 서로 스며들며 조금씩 달라졌다. 48점은 개별 감정을 하나씩 다루는 동시에 한 감정이 다른 감정을 불러오고 변형시키는 전체 구조를 이룬다. 이 연작은 2019년 베를린 Irrgang Gallery에서 열린 개인전 《CUT.BACK》을 통해 처음 발표했다. 당시 48점을 액자 없이 세탁소 비닐에 담아 행거 구조에 걸었다. 관람자는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막대로 작품을 움직이며 살펴볼 수 있었다. 생활 속 포장과 도구를 전시 장치로 옮겨오고, 작품을 골라 들여다보는 행동까지 감상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다.

기억과 리듬의 안무, 설치 작업에 관하여 (2025–2026) #SunlitNotes 설치 작업을 떠올릴 때 나는 완성된 형태보다 그 공간에 머물렀던 시간을 먼저 기억한다. 작품의 위치보다 빛이 들어오던 방향이나 전시장 안을 여러 번 오갔던 길이 더 오래 남아 있기도 한다. 설치는 한정된 장소와 시간 안에서 존재하다가 전시가 끝나면 해체된다. 이후에는 사진과 일부 유닛이 남지만, 작품 사이의 거리나 빛에 따라 달라지던 표면, 관객이 걸음을 늦추거나 몸을 돌리던 지점까지 기록되지는 않는다. 독일 예술대학교에서 입체와 설치를 공부하던 시절, 수업에서 자주 이야기했던 것도 공간과 시간의 문제였다. 작업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관객이 어느 거리에서 그것을 만나는지, 제작 과정에서 남은 흔적들이 어떻게 전시의 일부가 되는지를 오래 토론했다. 그곳에서 설치는 쓸모를 먼저 입증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의 형식으로 존재했고, 그 형식을 성립시키는 조건을 살피는 일이 중요했다. 2013년 여름의 과제전은 설치의 시간성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나는 흙으로 수건의 형태를 만들고 그것을 설치의 한 요소로 사용했다. 전시 기간 내내 흙이 마르지 않도록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돌보았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모두 부서졌다. 나는 그 소멸을 견디지 못해 수건 형태를 테라코타로 구워 남길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교수는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형태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흙이 마르고 갈라지고 다시 젖는 동안 이어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 작업은 오래 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잠시 특정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야 설치에 들인 시간과 노동을 남은 결과만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전시가 끝난 뒤 작업을 해체하는 일이 쉬워진 것은 아니다. 설치는 내게 여전히 어렵고 고단한 과정이다. 그동안 만든 구조를 거두거나 부수어야 할 때면, 무엇이 남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학교 밖의 전시 현장에서는 설치에 필요한 시간과 노동이 비용과 부담으로 계산되곤 했다. 운송과 반입, 인력, 유지 관리와 해체가 필요하지만 준비와 철수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 조건에 맞추는 동안 현장에서만 가능한 판단과 실험을 조금씩 생략하게 되었다. 작업을 공간 안에서 여러 방향으로 펼치기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들여놓고 다시 가져갈 수 있는 형태로 좁히기도 했다. 반대로 전시장에 충분히 머물 수 있으면 도면에서는 알 수 없었던 관계가 보인다. 평면도에서 나란히 놓인 두 유닛이 실제 공간에서는 서로를 가리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떨어진 요소와 더 강하게 이어지기도 한다. 안으로 들어가 여러 거리에서 바라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24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에서는 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작품과 유닛 대부분은 작업실에서 준비해 가져갔지만, 무엇을 어디에 놓아 하나의 장면을 만들지는 미리 정하지 않았다. 열흘 동안 전시장에 머물며 벽과 바닥, 시선이 멈추는 곳과 사람이 방향을 바꾸는 자리를 살폈다. 작업실에서는 서로 무관했던 종이 조각과 오브제의 파편을 옮겨보면서 공간과 맞물리는 지점을 찾았다. 작은 종이 조각 하나를 덜어냈을 뿐인데 주변의 간격이 넓어지기도 했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으면서도 한 장면 안에 머물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싶었다. 2026년 아트사이드 템포러리에서 열린 《나이없는 계절》에서는 조각들을 모으는 일보다 그 사이를 잇는 일에 마음이 갔다. 덩어리가 되기 전과 흩어진 이후의 상태를 공간에 드로잉하듯 놓아보았다. 전시장에서는 벽과 바닥의 비율, 작품 사이의 거리,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작업실에서 예상하지 못한 선들이 나타났다. 실제로 그어진 선은 아니었다. 사물과 사물 사이, 벽면과 바닥 사이를 바라보는 동안 생겨나는 선이었다. 나는 그것을 따라 작품의 위치와 방향을 조금씩 바꾸었다. 어떤 유닛은 앞으로 더 나와야 했고, 어떤 것은 중심에서 비켜나야 했다. 빈자리를 다른 작업으로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었다. 이런 판단을 미리 정한 규칙만으로 할 수는 없었다. 공간을 걷고, 몇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갔다. 같은 자리도 걸음을 달리해 지나면 다른 관계가 보였다. 설치하는 동안 나는 작품을 옮기고 물러서고 다시 걷는다. 작업실에서는 따로 있던 사물들이 전시장에 들어오면 저마다 다른 박자와 간격을 갖는다. 어떤 곳에서는 걸음이 빨라지고, 어떤 곳에서는 시선이 오래 머문다. 지나치게 설명되는 부분은 덜어내고, 서로를 가로막는 요소는 조금 비켜놓는다. 설치 기간에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걸으며 그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전시가 끝나면 그 간격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어느 작품 앞에서 발을 멈추었는지, 무엇을 옮긴 뒤 비로소 다음 자리로 걸어갈 수 있었는지는 몸에 남는다. 내가 설치 작업을 기억할 때 먼저 떠올리는 것도 완성된 전경보다 그 공간을 오가며 조금씩 바꾸었던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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